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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5:33-37 본문
드디어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이다. 해조차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33절). 예수께서는 시편 기자의 탄식을 내뱉으신다(34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하나님이 그 아들을 버리셨다. 모든 저주가 그 몸 위에 임하였다.
이 극적인 순간에조차 인간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했다(35절). 엘리야는 당시 사람들이 기다리던 또 하나의 구원자였다(말 4:5-6; cf. 막 9:11-13). 이들은 예수가 그 구원자를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롱조로 말한다.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36절) 여기서도 이들이 어떻게 '구원'을 이해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그들에게 구원은 "그를 내려 주"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신 포도주를 예수께 먹인 것(36절)도, 예수가 조금 더 버티면서 기적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다려 보자. 어쩌면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줄지도 모른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다닌다는데, 혹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그러한 구원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온갖 조롱과 저주를 한 몸에 받으며 운명하셨다(37절).
예수는 스스로 구원하기를 포기함으로써 온 인류를 구원하셨다. 여기에 구원의 역설이 숨어 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버리셨고, 아들은 스스로를 포기했다. 무엇을 위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외에 무슨 사랑의 증거를 더 찾겠는가? 그 사랑에 만족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원한다.